성경에 ‘갈대상자’ 이야기가 있다.
이집트 제국이 히브리 민족을 노예로 부릴 때 일이다. 히브리 민족의 남자가 점차 많아지자 이집트 왕은 위기를 느낀다. 왕은 인구조절 정책으로 갓 태어난 히브리 민족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때, 요게벳이라는 여인은 갈대로 상자를 엮어 자기 아이를 담아 나일강에 띄워 보낸다. 이집트 군인에게 아이를 빼앗겨 죽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신에게 맡기겠다는 마음이었다. 어머니 손을 떠나 나일강을 따라 유유히 흘러간 갈대상자는 이집트 공주가 목욕하는 물가에 이른다.
갈대상자를 본 이집트 공주가 상자 속 우는 아이를 보고는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 아버지가 죽이라고 명령한 히브리 민족의 사내아이인데도 공주는 시녀를 시켜 히브리 유모를 부른 뒤 젖을 먹이라 명하고, 아이를 자기 아들로 삼는다. 이집트 군인 손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기가 이집트 왕자가 되는 순간이다. 또, 시녀가 공주의 명에 따라 데려온 유모는 아기의 어머니, 요게벳이다! 아기를 살릴 수 없는 형편인데도 품에 끌어안고 있었더라면 죽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신에게 의탁했더니 아기가 이집트 왕자가 되어 자기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빠, 왜 사람들이 아기를 죽게 내버려 두는 거야?”
저녁 시간, 뉴스를 함께 보던 11살 아들이 묻는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가슴 한편이 아리다. 입술이 떼어지지 않는다. 그러게 말이다. 이집트 왕이 보낸 군대가 있던 시절보다 더 잔혹하다. 어찌 부모가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이고, 또는 죽게 만든단 말인가.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일까.
요즘 뉴스에서 연일 ‘영아 유기 사건’을 보도한다. 언론을 타고 사건의 심각성이 대중에 알려지자 경찰에 신고되는 미신고 아동수가 매일 100~200건씩 급증한다고 한다. 얼마 전 감사원은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 수가 2232명(2015~2023년생)이라고 발표했다. 2232명…
주여, 부디 여린 생명들을 구원하소서
문득, 헨리 조지가 쓴 <진보와 빈곤>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의지할 곳 없는 절망적인 빈곤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짐승 같은 노예로 만들며 고상한 천성을 얽어매고 섬세한 감성을 무디게 하며, 그 고통 때문에 짐승도 마다할 짓을 하게 만든다. 빈곤은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파괴하고 분쇄하며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함을 박탈하고 노동계급을 저항할 수 없는 무자비한 기계와 같은 힘으로 억누른다."
우리나라 경제력은 세계 15위권이다. 한편, 경제양극화와 같은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순자산 지니계수는 21년 기준 0.603이다. 5년 연속 증가하는 추세다.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깊다는 걸 나타낸다. 어떤 데이터를 보느냐에 따라 국가에 자긍심을 느끼기도 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자긍심이나 박탈감 같은 개인적인 소회를 느낄 때가 아니란 거다.
숫자는 진실을 가리거나 사람의 마음을 무디게 만든다. 갈대상자 속 아이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게 하는 인간성은 ‘통계’라고 부르는 데이터 장막에 가려져 무뎌지고 만다. 경제 대국이 되었다 해도 빈곤은 이집트 왕이 보낸 군대가 되어 노예와 다름없이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의 집 문을 걷어 차고 있다. 물질적 풍요에 취한 현대인들은 긍휼과 자비를 상실한 채 무감각한 마음으로 빈곤을 바라본다.
영아 유기, 영아 살해 사건의 뿌리는 빈곤이다. 빈곤은 모성애를 짓이겨 파괴한다. 가난은 아이를 잉태한 기적을 저주로 왜곡하고 폄훼한다. 빈곤 늪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은 한 식구 늘어나는 게 저주와 다름없다. 빈곤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뉴스를 보며 혀를 끌끌 찰 뿐이나, 거대한 쇠무게추 같은 가난과 빚에 억눌린 사람은 조금이라도 무게를 덜고 싶은 마음 뿐이다.
영아 살해나 유기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시공간은 지옥이다.
우리 앞에 지옥이 펼쳐져 있다. 다른 사람이 처한 빈곤에 무뎌지는 건 시뻘건 불구덩이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를 방관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부모가 제 손으로 자기 자식을 죽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이와 부모를 건져내는 방법은 없나. 하루라도 빨리 마련해야 한 생명을 죽음에서 삶으로 건져내지 않겠나!
'주사랑공동체'라는 민간재단에서 운영하는 ‘베이비박스’는 2022년까지 2041명의 아이를 살렸다. 이종락 목사가 시작한 ‘베이비박스’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위기에 처한 영아를 보호하고, 미혼모를 편견 없이 지원하는 단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민간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위기에 처한 영아를 살리는 일을 재단과 교회 몫으로 떠넘길 것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법과 제도로서 구조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그런데 보도되는 소식을 보면, 법제도 정비에 접근하는 시각은 영아를 유기하거나 살해한 부모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옥에서 신음하며 허우적대는 부모에게 벌을 더 가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처벌보다는 예방과 구제가 먼저다. 지옥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이는 베이비박스를 탓하기도 한다. 왜 베이비박스 같은 걸 만들어서 영아를 유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느냐 묻는다. 또 예방과 구제하는 차원에서 법과 제도를 마련하면 영아 유기가 증가하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그러한가.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일단 생명은 먼저 살려야한다. 지옥 불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는데,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쳐다보며 냉소하는 이들을 보니 더 비참하다. 우리 나라와 달리 몇몇 선진국은 이미 국가가 베이비박스와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냉소하는 이들은 사회적 비용을 운운하며 엄살을 피운다. 사회적 비용은 비겁한 변명이다. 우리나라 출산율 지수는 0.78명으로 세계 최하위이다. 인구 피라미드상 앞으로 우리 사회 노동시장 유지와 은퇴 후 연금운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에 비하면 위기에 처한 아이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은 우리 사회가 충분히 감당해야할 비용이지 않을까. 아이 생명의 소중함마저 경제 논리로 설명해야 하는 현실이 비정하다.
우리 사회에 갈대상자가 필요하다. 빈곤이라는 군대가 칼을 들고 우리의 아이들을 위협할 때, 여린 생명을 숨기고 맡겨둘 수 있는 갈대상자. 생명은 기적이며,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한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은 지난날보다 한 걸음 더 나은 가치를 만드는 생명이 담은 창조성의 존귀함을 뜻하는 말이다. 갈대상자가 어디론가 흘러 작고 여린 생명이 건강한 공동체를 만난다면, 그리고 신이 내린 은총이 함께한다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하는 위대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혹, 그러지 못해도 괜찮다. 살아있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새롭게하니. 그러니, 꼭 살려야 한다.
성경에 등장한 갈대상자 속 아이는 히브리 민족의 영웅 ‘모세’로 자란다. 모세는 이집트 왕자로 자라고, 사건에 휘말려 이집트에서 도망쳐 나와 40년간 광야에서 살다 신의 명령을 받고 다시 돌아와 히브리 민족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킨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 모세와 대적한 이집트 왕은 결국 신이 내린 열 번째 재앙으로 첫아들을 죽게 만든다. 인구조절정책이라며 히브리 민족 아이를 죽인 이집트 왕은 결국 자기 첫째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 자업자득이다.
우리는 갈대상자 이야기가 말하는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참고자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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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도 어려운 베이비박스 아기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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