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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가을을 걷다

by 마빡목사 2023.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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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걷다

  아침으로 차가운 외풍이 코 끝을 간지럽힌다. 유난히 후덥지근하고 질척거리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얼굴을 싹 바꿔 쌀쌀해졌다. 까만 정장과 선글라스를 쓰고 빌딩 숲 속을 거니는 도시여자, 가을이 왔다. 가을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고 까칠하다. 하지만 낮이 되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따스함을 건넨다. 여름에 푸르게 한껏 부풀었던 수풀과 나뭇잎은 가을의 눈부신 미모에 반해 빨갛게 노랗게 익어버린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다. 

  성큼 다가온 가을 날씨로 아침마다 안방 공기가 차갑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방바닥에서 올라오는 뜨끈함이 노곤해진 나를 붙들어 안고 놓아주질 않는다. 손목에서는 스마트워치가 빨리 일어나라고 채근한다. 간신히 눈꺼풀을 올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일곱 시다. 알람은 다섯 시 반에 맞췄는데, 정신을 차리기까지 한 시간 반이 걸린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분주하다. 한 시간 반을 이불속에 묻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억울하다.

  아침 운동을 나가려고 방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등짝을 힘겹게 걷어 올린다. 한 시간 반 전에 했어야 할 일이다. 지체된 시간을 단축해 보려고 오래간만에 군대에서 아침점호를 준비했던 군기를 끌어올려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는다.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연다. 차가운 가을 아침 공기가 나를 빨아들인다. 집 밖을 나와 5킬로미터 떨어진 편백 숲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다섯 달 전, 일주일 넘게 병원에 입원했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이 염증을 키웠다. 염증으로 입원 치료를 받은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렸을 때와 달리 경각심의 무게가 몹시 무거웠다. 다섯 식구를 책임져야 할 가장의 무게였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담당 의사가 덤덤하게 한 말이 마치 하나님의 음성 같았다.

  "체중을 줄이고, 운동을 꾸준히 하세요."

  그날 이후,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혈기가 왕성하던 시절을 생각하며 조금 뛰었더니 곧바로 무릎에 통증이 왔다. 뛰기를 멈추고 무작정 눈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뛸 때는 거친 숨소리와 정신 사나운 심장 박동, 무릎 통증이 의식을 가득 메웠다. 그런데 걷기 시작하니 가장 먼저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길가에 추운 공기로 딱딱하게 굳은 조그만 개똥이 눈에 띄었다. 개똥 옆에는 단단한 콘크리트 도로를 뚫고 자란 들풀이 강인한 생명력을 뽐냈다.

  걷다 보니 길을 찾는 재미가 있었다. 뛰거나 자전거를 타려면 안전한 도로로 다녀야 한다. 도로는 목적지가 정해진 길이다. 도로를 타면 목적지로 향해야 한다. 하지만 길은 내가 걸어온 흔적이자 내가 가고자 하는 미래였다. 다음 날부터 집 주변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마음껏 누볐다. 벌거숭이 아담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듯한 자유를 느꼈다. 나만의 걷기 운동 코스를 매일 만들었다. 코스는 고정되지 않았다. 매일 걷기 운동 코스는 그날의 내가 정하기에.

  매일 10킬로미터 정도를 걷는다. 대략 1시간 50분이 걸린다. 요즘은 주로 완주군 상관면에 자리 잡은 편백 숲을 향해 걷는다. 집에서 편백 숲 입구가지 대략 5킬로미터여서 왕복하면 10킬로미터가 된다. 집에서 전주천변까지 1킬로미터, 전주천변에서 편백 숲이 있는 마을 다리까지 2킬로미터, 다리에서 편백 숲 입구까지 가는 길이 2킬로미터이다. 각기 풍경이 다르다.

  집에서 전주천변까지 가는 길은 사람 사는 풍경으로 가득하다. 집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지 된장국 냄새, 전 부치는 냄새가 후각을 타고 아침 밥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집 근처 도로 공사 현장을 지날 때, 안전모를 쓰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노동자들을 본다. 한 손에는 믹스커피를 탄 종이컵, 다른 손에는 속절없이 타들어 가는 담배 한 개비가 있다.

  가을이 되니 마을 집 곳곳 굴뚝에서 장작불을 뗀 연기가 피어오른다. 굴뚝에서 막 피어오르는 연기와 누군가의 한숨이 담긴 담배 연기가 가을 아침 안개와 뒤섞인 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처마에 걸터앉았다. 가을 아침 하늘은 높고 푸른 낮 하늘보다 뿌옇다. 가을 아침 공기는 상쾌하기보다 매캐하다. 전주천변 인적 드문 길이 순간 그리워진다.

  편백 숲으로 가는 전주천변 길은 수풀과 새, 산과 물이 어우러진 풍경이다. 인적이 드문 대신 백로, 까치, 까마귀, 참새가 있다. 백로는 물음표로 있다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큰 날개를 펴고 달아나버린다. 반갑게 인사하고 싶은데 눈 한번 마주치지 않는 백로가 야속하다. 까치와 까마귀는 어찌나 자리다툼을 해대는지 날마다 전투기 공중전을 방불케 한다. 참새는 고개 숙인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재잘재잘 수다를 떨다가 내가 다가가면 떼로 도망가버린다. 

  가을이 된 후로 전주천변 물줄기가 엷어졌다. 전주천 조약돌 사이로 가녀린 물줄기가 힘겹게 흐른다. 수풀도 푸른빛에서 노란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왠지 모르게 높고 푸른 하늘과 달리 지쳐 보인다. 산속에 드문드문 단풍이 든 나무 빛깔이 얇은 물질기 속에서 춤을 춘다.

  가을이 되니 편백 숲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저마다 편백 숲으로 달인 보약을 찾으러 오는 가보다. 나는 편백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찍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왔던 길인데 풍경은 색다르다. 가을 아침 볕은 내가 걸어온 흔적을 완전히 새로운 가을 길로 물들여 버렸다.

  가을 아침 길을 걷는 옷 두께가 점점 두꺼워진다. 가을의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빛에 취하다가도 내 힘으로 붙잡을 수 없는 첫사랑이라는 걸 깨닫는다. 걷다 보니 겨울 길이 저 멀리, 희미하게 내게로 다가온다. 겨울 길은 어떤 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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