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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선물

by 마빡목사 202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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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통장 잔고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지갑이 텅 비었다. 한편, 마음은 따뜻했고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 아들을 데리고 서울을 다녀왔다. 모야모야병으로 수술을 한 후 삼 년 동안 네 번, 올해로 다섯 번째 외래 진료다. 병원 나들이는 어느새 둘째 아들과 나, 둘 만의 서울 나들이가 되었다. 둘째 아이는 왼쪽과 오른쪽 머리에 혈관을 심는 수술을 하려고 각각 6개월 간격을 두고 두 번, 수술 후 경과를 보려고 MRI검사를 또 두 번, 서울 병원에 오고 가곤 했다. 경과가 좋아서 예약해 놓은 MRI검사와 외래 진료를 받으러 2021년도 이후 2년 만에 다시 병원을 찾았다. 

 올해는 하필 추석연휴와 개천절까지 끼어서 열차표를 예매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표를 구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하루 전에 예약한 검사 시간에 딱 맞춰 갈 수 있는 표가 기적처럼 나왔다. 딱 두 자리.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 이런 걸까. 하지만 계획 세운대로 해야 하는 모난 성격 덕분에 차표를 예매하고 나니 걱정거리가 덕지덕지 붙었다.

 '예약 시간에 맞추려면 역에서 내려서 병원까지 뭘 타고 갈까? 원무과에 수납은 언제 어떻게 해야 하나? 점심은 뭘 먹어야지? 점심을 먹고 난 뒤 진료시간 사이에 어디서 뭘 하지? 진료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 전까지 뭘 하지?' 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런저런 염려들이 눈꺼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다행히 진료가 끝난 뒤에 뭘 할지는 둘째 아들이 정해 주었다. 며칠 전부터 '서울에 가면 어디로 놀러 갈 거야?'라고 자꾸 물어보더니, '이번에는 63 빌딩에 가고 싶다.'라고 했다. 63 빌딩이라니... 2015년생 쪼끄만 아들에게 123층 롯데타워가 아닌 63 빌딩 환상을 심어준 게 누구일까. 서울에 올 때마다 한강철교를 지나며 '저게 63 빌딩이야.'라고 자랑하듯 말하던 아빠 탓이겠지. 어쨌든 둘째 아이 덕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염려 하나가 줄었다.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듯 하나둘씩 걱정거리를 처리하고 난 뒤, 모든 계획은 시간의 강물에 맡겼다. 잔잔히 흐르는 한강 물결처럼.

 올해 아들은 수면마취를 하지 않았다. MRI촬영을 할 때 아이가 움직이면 제대로 촬영할 수가 없어서 대체로 아이들은 수면마취를 한다. 이번에 수면마취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불안이 사라졌다. 수면 마취 약을 맞자마자 바로 눈이 감겨 잠들어 버리는 아이 모습을 볼 때마다 매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이제 의사 선생님 손을 잡고 의젓하게 MRI검사실로 걸어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니 가슴이 벅차 올랐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손바닥 크기만큼 으쓱했다. 

 수면마취를 하지 않으니 촬영도 금방 끝났다. 조영제를 투여하려고 혈관 주사를 놓을 때 울지 않고 견뎌낸 것이나 마취 없이 늠름하게 촬영을 마친 데 대한 보상을 하고 싶었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먹이러 갔다. 병원 식당에 있는 베트남식 쌀국수 집에 가서 맘껏 고르라고 했더니, 메뉴 중에서 가장 비싼 '차돌박이 쌀국수'를 골랐다. 거의 치킨 한 마리 값인 쌀국수를 두 개나 주문했다. 하나는 아이가 고른 차돌박이, 하나는 아이가 좋아하는 바지락을 먹이려고 내가 시킨 해물 쌀국수.

 아들은 어젯밤부터 금식하느라 배가 많이 고팠는지 자기 얼굴만 한 쌀국수 그릇 하나를 후딱 비웠다.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먹는 아이를 보며 나도 금세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릇을 싹 비웠다. 쌀국수를 많이 먹어보진 않았지만 세상 어느 쌀국수보다 맛있었다. 맛의 비결은 '아, 배부르다'하며 주먹만 한 배를 통통 두드리는 둘째 아이의 흐뭇한 표정이었다. 

 점심을 해결하고, 병원 옥상 정원에 갔다. 3년 전, 수술을 마치고 입원한 아이를 산책시키러 휠체어에 태워 자주 오던 곳이다. 시간여행을 온 것 같았다. 장소는 그대로인데, 비둘기를 쫓아다니며 노는 아이를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피주머니를 달고 휠체어에 앉아 있던 아이가 어느새 건강하게 자라서 아빠 손을 이끌고 다니니 미소가 심장에서 솟구쳐 올라와 얼굴에 퍼졌다. 

 오후에 간단히 외래 진료를 마치고, 아이가 바라던 대로 63 빌딩에 갔다. 아이는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는 내내 둥둥 떠있었다. 어렸을 때, 서울에 사는 이모가 서울에 오면 고개를 위로 쳐들지 말라고, 촌놈 티 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이는 연신 높은 건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서울은 키가 엄청 큰 건물이 많다.'라며 상경한 촌놈 냄새를 풀풀 풍겼다. 내 아들이 촌놈이면 어떤가. 보는 것마다 신기해서 호기심 섞인 미소가 떠나지 않는 아들 얼굴 보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서울 사는 사람은 잘 모를 게다.

 일만 오천 보. 병원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63 빌딩까지 걸어서 이동하고, 전망대에 갔다가 수족관을 둘러보는 동안 걸은 걸음수다. 점심때, 배가 터지게 먹었던 쌀국수가 어느새 소화가 다 되었다. 허기를 채우러 63 빌딩 1층에 있는 어느 카페에 들렀다. 아이가 좋아하는 초코 브라우니 하나, 내가 좋아하는 치즈타르트 하나, 그리고 민트 초코라테를 주문해서 먹었다. 연인처럼 데이트를 즐기는 데, 아이가 뜻밖의 고백을 했다.

 "지금까지 먹어 본 케이크 중에서 제일 맛있어!" 

 얼마나 맛있길래 저런 말을 하나 싶어 한 숟가락 떠먹었는데,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그래, 너도 그 맛을 알았구나. 소중한 추억의 맛. 덩달아 내가 먹은 치즈타르트도 영원히 잊지 못할 세계 최고의 맛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 전에 형과 여동생에게 줄 선물을 고르러 갔다. 아들이 직접 고른 작은 붕어빵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설탕 가득 묻은 도넛을 샀다. 선물꾸러미는 아들이 들게 했다. 선물꾸러미가 시소를 타듯 앞뒤로 흔들린다. 신나게 발걸음 하는 아들을 보니 몸이 가벼워졌다. 어느새 나도 하늘을 날고 있었다. 

 단 하루 둘째 아이와 함께 한 서울 나들이. 통장잔고를 생각하지 않고, 발 닿는 대로 손 닿는 대로 돈을 쓰고 말았다. 교훈 때문이었다. 둘째 아이를 수술실에 들여보내놓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하염없이 울면서 얻은 교훈.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걸.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하늘에 맡겨야만 할 때가 있다는 것. 

 선물은 바라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기쁨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받는 기쁨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둘째 아들에게 큰 선물을 받았다. 건강하게 곁에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선물이지만, 그 선물이 훨씬 더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내 영원한 기쁨, 우리 '나라'.

 그날 깊은 밤, 아이들이 잠들었는지 확인하러 방에 들어갔다. 하루 종일 서울 땅을 신나게 밟고 다니던 둘째 아들은 대자로 뻗어 자갈 구르듯 코골이를 하며 잠을 자고 있다.

 둘째 아들, 나라의 입가에 별빛이 쏟아지듯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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