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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개나리꽃 필 무렵

by 마빡목사 2024.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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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꽃 필 무렵

 따스한 봄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스친다. 훈훈하게 부는 바람은 이내 개나리꽃을 잠에서 깨운다. 개나리는 뒤척이며 눈 비비듯 꽃 머리를 든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개나리꽃 잎 사이로 봄바람이 내게 속삭인다.

 어김없이 내가 왔어요. 약속했지요? 기억하기로.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면 일 년 내내 철조망 사이에 잇대어 피어있는 노란 리본 꽃이 떠오른다. 꽃잎에는 그날에 한 약속이 까만 글씨로 새겨져 있다. 노란 꽃잎 위에 위태롭게 선 약속들은 1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몸살을 앓는다, 목포신항에 핀 노란 리본 위에서.

 첫째 아들 하늘이가 태어난 지 십 개월이 지난 때였다. 아빠라는 말도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하던 때. 눈에서 멀어지면 눈 앞에 하늘이가 아른거리고, 보고있어도 보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한참 ‘아빠’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배워가던 가운데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바다에 반쯤 잠긴 채 침몰하는 장면을 뉴스로 보았다.

 처음에는 ‘전원 구조’라는 속보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곧 언론사가 속보 경쟁을 하다 잘못 나온 보도라는 걸 알게 됐다. 맨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힌 것처럼 입에서 쇠 맛이 났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하늘이 뒤로 가라앉고 있는 세월호가 보였다. 지금 당장 아이를 건져낼 수 없다는 처참한 무기력이 전해졌다. 갓 아빠가 된 나에게 팽목항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엄마아빠의 절규가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눈앞에서 차디찬 바다가 아이의 생명을 삼키는데도, 살려달라고 살려내라고 울부짖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차라리 내가 죽을 테니 내 아이를 돌려주라고 하늘에 손이 닳도록 빌어도 그 바람은 절대 이뤄질 수 없다는 것. 그 깨달음은 사람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무게로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유가족을 짓눌렀으리라.

 그로부터 5년 뒤, 네 살 된 둘째 아들 나라가 모야모야병으로 머리뼈에 구멍을 뚫는 수술을 해야 했다. 아이를 눕혀 태운 침대를 따라 수술 대기실까지 따라갔다. 마지막 수면 마취를 하고 의사들 손에 아이를 맡겼을 때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아빠로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도밖에.

 수술 대기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급히 들어갔다. 홍수가 제방을 무너뜨리듯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연신 찬 물로 세수했다. 거울 속에 토끼 눈을 한 초라한 아빠가 보였다. 그때 알았다. 자식을 위해 뭐든지 다 해줄 것 같이, 자기 생명을 자식을 위해서라면 내어줄 수 있을 것처럼 호기롭게 말해도 절대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걸 알았다.

아빠는 너 대신 아파줄 수 없다.
아빠는 너 대신 울어줄 수 없다.
아빠는 너 대신 슬퍼할 수 없다.
아빠는 너 대신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널 대신 해 줄 수 없다.

 

 대신 할 수 없다는 아빠의 무능을 깨달은 다음 날부터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모레, 다음에, 미루지 말고 오늘.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지. 아마도 세월호 희생자의 유가족은 그날 이후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았을 거다.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날마다 있는 힘을 다해 사랑했으리라, 멀리 떠난 아이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월호 참사 10주기. 개나리꽃 필 때마다 그때 거기서 엄마아빠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유가족들은 여전히 봄바람에 눈물을 훔친다. 사랑하는 아이가 따스한 바람이 되어 가늘게 떨리는 엄마아빠의 등을 감싼다. 눈물의 강이 흐를 때 나 역시 울컥 터져 나온다. 10년이 지나도 마르지 않는 눈물이.

 목포 신항, 벌겋게 녹슨 세월호 둘레에 ‘잊지 않겠다’는 글씨가 새겨진 노란 리본이 초록색 철조망에 잇대어 개나리꽃처럼 피어있다. 사시사철 꽃잎은 지지 않는다. 기억은 힘이 세다.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세월호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날이 오더라도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영원하다.

 노란 개나리꽃 잎 위로 봄바람이 사뿐히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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