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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파랑새

by 마빡목사 202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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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차창 밖 빗물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창밖을 향해 몸을 돌린 채, 비스듬히 누워 잠을 청하던 스무 살 청년의 어깨가 이내 바르르 떨린다. 굵은 빗줄기 사이로 달리는 고속버스 엔진소리가 흐느끼는 청년을 덮는다. 빗물이 차창에 방울로 맺혀 알 수 없는 곳으로 주르륵 흘러 흩어지듯이, 청년의 첫사랑은 차창 밖 빗방울처럼 떠났다.

 늘 외로움에 쫓기듯 살았다. 외동아들로 태어나 혼자 자랐다. 어머니는 교회 전도사로 아버지는 유조선 기관사로. 세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보다 혼자이거나 둘이었던 시간이 훨씬 많았다. 엄마와 아빠로 채우지 못한 빈 마음에 외로움은 똬리를 틀었다. 거부할 수 없는 불편한 손님이었다. 불청객을 쫓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으로 텅 빈 곳을 채우는 것이었다.

 아직 여물지 못한 풋내기 밤송이. 세상엔 온통 사랑할 줄 모르는, 서투른 밤송이 투성이다. 사랑에 목마른 어린아이가 진짜 사랑을 할 리 만무하다. 푸른 밤송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어쭙잖게 연애 비슷한 것을 했다. 아이들 장난 수준이겠거니, 아니다. 꼬맹이는 매번 진심이었다. 불청객이 찾아오는 게 너무 불안하고 싫었으니.

 가시로 제 몸을 감싼 밤송이는 고등학교 2학년, 나영이를 만난 뒤로 무르익었다. 가시투성이 껍질을 터뜨리고 그 사이로 알밤이 고개를 내밀듯,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길어야 6개월을 넘기지 못했던 연애가 한창 공부해야 할 고3 시기도 거뜬히 넘겼다.

 서로 힘들 때마다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았다. 이전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마음을 나영이에게 처음 받아보았다. 함께 있으면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힘과 용기를 불어넣는 친구였다. 늘 넓고 포근한 품으로 날 맞이하는 잔잔한 호수였다.

 나영이는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감당할 줄 아는 어른처럼, 이제 갓 스무 살이었는데도. 반면, 나는 여전히 어렸다. 나영이가 사는 세상은 내 세상보다 훨씬 컸다. 나는 파랑새를 가둔 새장이었다.

 대학을 각각 서너 시간 떨어진 곳으로 갔다.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울 거란 환상에 젖어있었다. 고3 때도 애틋했던 사이가 멀어질 리 없을 거라 믿었다. 환상에 금이 간 건 나영이와 같은 대학에 간 고등학교 동창의 연락이었다.

 봄학기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뜬금없이 동창에게 연락이 왔다. 대뜸 나영이랑 헤어졌냐고 물었다. 무슨 소리냐고 버럭 화를 냈다. 동창은 자기가 잘못 본 것일 수 있겠지만 어떤 남자 선배랑 손을 잡고 다니는 걸 봤다며 확인해 보라고 채근하며 전화를 끊었다.

 잔잔하던 호수가 폭우에 불어나 거칠게 범람하는 누런 홍수가 되었다. 불안이 점점 공포로 변해 온몸을 휘감았다. 근래 서운했던 기억의 조각들이 서로 엉겨 붙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바로 차표를 끊어 나영이가 다니는 대학으로 향했다. 내가 간다는 소식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의심하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보 같이. 나영이는 극구 오지 말라며 말리는 문자를 세 번이나 보냈다. 도착 시간이 다가올수록 끝을 예감했다. 하지만, 끝이 나더라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하루 수업을 모두 제쳐두고 나영이가 지내는 곳에 도착했다. 자취방이 있는 건물 앞에 서서 기다렸다. 일 분이 한 시간 같은 하염없는 기다림 끝에 저 멀리 익숙한 파랑새가 다가온다. 늘 마음속에 있지만 잡을 수 없었던 파랑새.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나영이가 말하지 않아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다. 나영이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밥은 먹었는지를 물었다. 밥이 넘어갈 리 없는데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이는 나를 자취방에 데리고 들어가서 돼지고기볶음을 해줬다.

 밥상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있는데도 거리가 멀었다. 말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나영이는. 수저를 뜨는 분위기가 아닌데도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 만찬, 밥공기가 비어갈 때쯤 밥알 흘리듯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붙잡을 수 없단 걸 알면서도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럴수록 나영이는 더 미안해했고, 점점 더 거리가 멀어졌다. 그래, 이제 파랑새는 새장을 떠나 자유롭게 날아야지.

 현관에서 이별 인사를 나누고 힘겹게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뗐다.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파랑새를 찾으러. 다행히 비가 내렸다. 빗속에 기대어 흐르는 눈물을 감춘 채 고속버스에 올랐다. 내심 마중이라도 나와주길 바랐는지 창밖을 두리번두리번 쳐다봤다, 미련하게.

 고속버스는 출발했다. 아무런 죄가 없는 버스 기사 아저씨가 원망스러웠다. 삼킨 울음을 울며 차창을 향해 몸을 돌려 울다 잠이 들었다. 창밖도 몸도 마음도 젖은 꿉꿉한 잠이었다.

 핸드폰 진동에, 잠에서 깼다. 나영이였다. 잠에서 덜 깬 건지 반갑게 전화를 받고 말았다. 칠푼이.

 전화기 너머 들리는 나영이 목소리는 울다 지쳐 목이 다 쉰 소리였다. 나영이 역시 삼킨 울음을 울다가 힘겹게 말한다.

“미안해… 미안해, 성현아. 미안해…”

“괜찮아, 울지마. 괜찮아 나영아…”

 서로 긴말하지 않아도 뭐가 미안한지 뭐가 괜찮다는 건지 알았다. 눈물이 말을 대신했다. 하늘이 같이 울어줘서 고마웠다. 전화를 끊고, 또 한참 울다 잠들었다.

 그날 이후, 파랑새를 가둔 새장이 허물어지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새장의 철 기둥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가면서 주변 사람을 아프게도 했다.

 새장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새장 자리에 또, 파랑새 한 마리가 있다.

 투둑투둑.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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