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수업
첫째 아들 하늘이와 셋째 딸 리라의 공개수업이 있는 날이다. 어젯밤 정적을 깨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처럼 잠자리에 들던 막내딸이 콧소리 섞어 귓가를 간지럽히던 말이 생각난다. “아빠, 리라는 발표하는 게 부끄러워. 부끄러워서 말 못 하면 어떻게 해? 발표하기 싫어.” 순간, 어린 딸이 처한 상황과 전혀 관계없는 군대 시절 짧은 이야기가 스치듯 떠올랐다. 신병교육대 교관으로 첫 발령을 받고, 대대장 앞에서 시범강의를 앞둔 때였다. 긴장해서 얼굴까지 창백해진 걸 보고 중대장이 조언했다.
“야, 2 소대장 떨지 마! 그냥 네 앞에 유치원생이 앉아있다고 생각해! 유치원생을 가르치듯이 하란 말이야!” 전혀 안정이 안 됐다. 대대장을 유치원생 취급하라니. 하지만 그 말이 머릿속에 박혀서 그런지 어느새 딸에게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리라야, 걱정하지 마. 그냥 네 앞에 있는 사람이 전부 다 유치원에 다니는 동생이라고 생각하면 돼.” 아빠가 한 말을 들은 딸아이의 반응을 보니 전혀 위로가 안 된듯했다. 하나마나한 말을 하고 말았다. 아빠 팔베개를 벤 채로 몇 번 더 모기처럼 앵앵거리더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막내딸의 공개수업은 오늘이 처음이다. 첫째랑 둘째 아들 공개수업은 참여한 경험이 있던 터라 설레는 마음이 텅 비었다. 하지만, 막내딸은 달랐다. 익숙한 초등학교 복도인데도 딸아이 교실로 가는 길은 처음 보는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한 학급에 열명. 계란 한 판 숫자도 안 되는 귀여운 병아리들이 조그마한 책걸상에 앉아 해바라기같이 선생님을 바라본다. 1학년이라 그런지 바람에 흔들리는 토끼풀이다. 한 시도 가만히 앉아 있는 아이가 없다. 그렇게 부산하게 움직이면서도 선생님 말을 다 알아듣는다는 게 신기하다.
국어 수업시간이다. 수업 주제는 ‘힘이 되는 말하기’. 선생님이 힘이 되는 말의 낱말 순서를 섞어 놓고 바르게 맞추는 문제를 낸다. 봉숭아학당처럼 너도나도 손을 들고 치열하게 ‘저요’, ‘저요’를 외친다. 그 순간, 맹구같이 아이들 가운데 들어가서 ‘저요’를 외치고 싶을 만큼 수업 분위기가 뜨거웠다.
뒤에 서있는 여러 부모는 저마다 표정이 다 다르다. 어떤 아빠는 두꺼비처럼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아마도 자기 딸이 발표하려고 손을 계속 드는데도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지 않아서인 것 같다. 어떤 엄마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발을 동동 구른다. 자기 아들이 집안의 비밀을 폭로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나 보다. 표정은 각양각색인데 시선은 고정이다. 모두 자기 아이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다.
흥에 가득 찼던 국어 수업을 마무리할 즈음, 선생님이 특별한 순서를 준비했다며 학생에게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발표하자고 한다. 공개수업에 올 부모님을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저마다 상상 속 선물을 미리 준비하라고 했나 보다. 한 아이씩 차례로 앞으로 나와 엄마아빠에게 주고 싶은 선물과 선물을 고른 이유를 발표한다. 캠핑카와 카니발 자동차가 나오고, 팔찌랑 과일도 나왔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발표할 때는 다들 호랑이 포효하듯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더니 앞에 나가서 혼자 발표를 하니 오징어 불에 굽듯 몸이 이리저리 오므라들고, 목소리는 염소울음소리처럼 가늘게 떤다.
리라 차례가 됐다.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계속해서 긴 생머리를 뒤로 넘기고 치마를 팔랑 거리면서, 목소리는 염소울음처럼 울음이 반쯤 섞여 얇게 떨리는 소리로 발표한다. “제가 준비한 물건은, 엄마는 꽃다발을 준비했고, 아빠는 깜짝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꽃을 좋아하는 것 같고, 아빠는… 아빠가 좋으니까… 아빠에게 깜짝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얼마나 떨었는지, 발표를 마치자마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자리에 가서 앉는다. 많이 긴장해서 그런지 울음이 터질뻔했는데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문장으로 보면 앞 뒤가 하나도 안 맞는 말이었지만, 딸아이 마음이 내 마음의 건반을 울린다.
딸이 손으로 그린 선물을 보니 케이크가 올려진 한 상에 엄마와 아빠가 서로 미소를 띤 채 마주 보고 있다. 엄마 뒤로 선물과 꽃다발이 놓여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이다. 딸아이를 꼭 안는다. 푸른 하늘을 품에 안은 기분이다.
딸아이 수업이 끝나고 아내와 같이 첫째 아들이 수업받는 5학년 교실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딸아이 교실에 가는 기분과 전혀 다르게 기대감과 귀찮음이 반반씩 섞여 있다. 평소 아들을 대하는 태도에 스스로 불만이 가득했다. 딸을 대하는 것처럼 첫째 아들에게도 부드럽게 말하고 싶고, 잔소리도 안 하고 싶지만, 마음과 다르게 첫째 아들에게 유독 툭툭 쏘아댄다. 한 번은 아내에게 고민 상담하듯이 조언을 구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왜 자꾸 하늘이에게만 말이 세게 나가는지 모르겠다며. 그래서 내심 불안했다. 첫째 아들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게 될까 봐.
아들의 공개수업도 국어 시간이다. 수업 주제는 ‘기행문 발표하기’. 수업 시작부터 하늘이 이야기가 나온다. 지난 수업시간에 하늘이가 가족여행 가서 찍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학생들끼리 느낀 점을 발표했다는 것이 아닌가. 수업시간, 하늘이 뒷모습은 집에서 보는 모습과 사뭇 다르게 의젓해 보인다. 뭔가 열심히 쓰고, 글을 다듬고 있다.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이 쓴 기행문을 읽고, 친구들이 묻는 질문에 답을 한다. 하늘이 차례가 됐다. 조바심을 느낀 내가 원망스러울 만큼 하늘이 기행문이 끝내줬다. 글 구조도 좋았고, 자료 조사를 어떻게 했는지 정확한 정보까지 논거로 들어 발표했다. 하늘이가 기행문을 읽는 동안 ‘우와’하며 감탄한 친구도 있었다. 깜짝 놀랐다. 집에서 보던 모습과 180도까지는 아니어도 150도는 다른 모습이다. 문득 깨달았다. 내 아들이 나보다 낫다. 그동안 내 좁은 세계에 우주 같은 아들의 세계를 가둬 놓은 건 아니었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수업을 마치고, 아들을 꼭 안았다. 우주가 날 안아주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아빠가 인생 수업을 받은 날이다. 푸른 하늘을 안았고, 우주가 날 안아줬다. 세상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선물을 받은 날이다. 아빠의 인생 수업이 참 즐겁다.
인생 수업을 함께 받은 아내 얼굴에도 화사한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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