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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하늘이

by 마빡목사 2023.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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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부스럭부스럭. 이른 아침, 주방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눈을 뜬다. 누군가 찬장과 그릇장을 요란하게 여닫는다. 주방 곳곳을 뒤적이다 갑자기 숨을 죽인다.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이내 느린 손짓으로 비닐 봉지를 움켜지는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깬다. ‘촥!’ 과자 봉지가 뜯기며 동시에 고막에 경보가 울린다. 잠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현장을 덮친다.

  “잡았다! 이놈.”

  암행어사 행세를 하는 아빠를 보고도 첫째 아들 하늘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놀란 기미가 전혀 없다. 이미 입안에 과자를 한가득 채우고 오물거린다. 능글맞은 눈매로 아침 인사를 건넨다.

  “아빠, 잘 주무셨어요?”

  해가 얼굴을 드러내기 전부터 밥 대신 과자를 찾아 먹는 아들에게 핀잔이 터져 나오려다 입술에 걸터앉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이른 아침 빈 배를 채우는 첫째 아들 좀도둑질을 나무랄 수가 없다. 그래, 먹고 건강하게 잘 자라만 다오.

  새끼강아지 같던 첫째 아들, 하늘이가 어느새 초등학교 3학년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부쩍 먹는 양이 늘었다. 덕분에 새끼강아지 시절, 귀엽게 자리 잡은 눈코입이 얼굴 살에 파묻혀 행방이 묘연하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하늘이 어깨가 어느새 아빠 가슴 높이에 다다랐다. 불뚝 튀어나온 뱃살이 아빠와 견줄만하다.

  지난밤, 샤워하고 나온 하늘이가 눈에 익은 옷을 입었다. 애 엄마가 여름에 입는 자기 잠옷을 하늘이에게 입혔다. 옷맵시가 하늘이에게 딱 어울린다. 엄마 옷을 제 것처럼 입은 하늘이를 쳐다보다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봇물 터지듯 웃음이 한바탕 터져 나왔다. 참 많이 컸구나. 이제 기억 속으로 떠난 우리 집 새끼강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구나.

  첫째 아이 이름은 천국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하늘나라’에서 ‘하늘'만 떼어 지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나라’로 지으려고. 하늘이 이름은 푸른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뜻한다. 푸르른 나무가 빼곡한 울창한 숲처럼 평화와 사랑이 푸지게 가득하고, 정의가 시냇물같이 흐르고 생명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그곳, 하늘이다.

  이름에 담긴 바람처럼 하늘이는 도담도담 자랐다. 하늘이가 아니었다면 다둥이 가족은 아마도 날마다 전쟁통이었을 것이다. 하늘이 덕분에 부모 역할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배웠다. 아들을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는 다른 부모의 너스레가 다 엄살인 줄 알았다. 성격이 야물고 까탈스러운 둘째 아들이 태어난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아들 키우는 게 원래 녹록치 않다는 것을. 다둥이 가족을 이루려는 바람은 하늘이 덕분에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요즘도 첫째 하늘이 덕을 본다. 열 살이 된 하늘이는 이제 제법 집안일을 본다. 초등학교 1학년 동생과 여섯 살 여동생을 엄마처럼 챙긴다. 두 동생을 욕실에 데리고 들어가 씻기는 일, 막내 여동생 양치질 시키는 일 등 엄마아빠가 귀찮아하는 일을 하늘이가 대신한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건조기에 넣는 일, 건조된 빨래를 개기 좋게 꺼내 놓는 일, 가끔 진공청소기로 거실 바닥을 청소하는 일 등 사소한 집안일도 거든다. 집안일을 돕고 동생을 돌보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싶으면서도 솔직히 염치가 없다. 아직 열 살짜리 어린아이인데.

  가끔 어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요즘 다둥이 키우는 게 애국이라고 입이 마르게 칭찬하신다. 실제로는 열 살짜리 아들에게 기대는 몰염치한 아빠인데 나라를 구한다는 칭찬을 들으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최근 우리나라 인구 피라미드를 양상을 보면, 10년 뒤에 역삼각형 구조가 완성된다. 나라를 구하는 것은 사실 하늘이 세대이다. 하늘이가 성인이 되면 경제활동을 하는 세대가 자기보다 두 배 이상 많은 노인 세대를 떠받치는 연령대가 된다. 하늘이가 들어야 할 애국지사 칭송까지 내가 가로채고 있는 셈이다.

  매일 같이 하늘이에게 빚을 진다 생각한다. 하늘이에게 주는 것보다 받은 게 더 많다. 먹을 걸 하나 사줘도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에 배가 부르다. 하늘이가 먹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맛은 세상 어떤 음식 맛으로도 채울 수 없는 독특한 미각이다. 또, 용돈을 주면 적은 용돈에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히 쓰는 모습에서 새삼 감사를 배운다. 적은 용돈이라도 값없이 베푸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마땅히 감사할 일이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신비로운 하늘나라는 기적처럼 오지 않고 하늘이를 통해 매일 나를 찾아온다. 하늘이가 안긴 평화와 사랑은 기적처럼 내게 신비로운 하늘나라를 맛보게 한다. 모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가을 하늘을 본다.

 

  청명한 하늘이 참 깊다.

사진: Unsplash 의 kim sung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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