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에 눈을 뜨다.
유튜브 채널 '플라톤아카데미TV'에서 한병철 박사님 강연을 듣고, 책 세 권을 바로 주문했다.『피로사회』, 『정보의 지배』, 『사물의 소멸』이다. 그중 먼저 『피로사회』를 읽었다. 책 두께가 얇아서 금방 읽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한 단어 한 문장이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는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읽는 내내 징이 울리는 것처럼 잠들어있는 지성을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느낌을 받았다. 책을 읽고, 가장 인상 깊었던 개념과 깨달은 점을 정리해 본다.
성과사회와 과도한 긍정성
한병철은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로 부른다. 성과사회를 이해하려면 규율사회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한병철이 정의한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규율사회는 '해서는 안 된다'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사람들은 규율에 따라 행동하도록 강요당한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에 등장했고,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확산되었다. 규율사회는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사회이다.
성과사회는 규율사회와 달리 '할 수 있다'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하고 생산성을 높이도록 강요당한다. 그러나 강요당하는 힘은 외부적이기보다 내부적이다. 즉, 산업화 사회에서 자본가에게 당하는 노동 착취에서 자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자기 착취로 바뀐 것이다.
특 징 | 규율사회 | 성과사회 |
통제하는 힘 | 외부 | 내부 |
통제하는 수단 | 규칙과 규제 | 성과와 경쟁 |
요구받는 태도 | 수동적이고 순응적 | 능정적이고 경쟁적 |
사회 분위기 | 경직되거나 보수적 | 유연하거나 진보적 |
정신병리 | 광인과 범죄자 | 우울증환자와 낙오자 |
피로사회는 성과사회의 한 특징이다. '탈진'을 의미하는 피로는 자아의 과도한 긍정으로 발생한다. 현대사회는 '성공'이 유일한 규율이다. 성공하기 위해 강조되는 것이 바로 "할 수 있다!(Yes, we can!)”라는 긍정성이다. 부정성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부정하지 못하거나 멈추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의 과잉으로 귀결되어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르게 된다. 오로지 자기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진다.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여 좌절하게 되고, 좌절감은 곧 우울증을 낳는다.
자기 착취와 역설적 자유
자기 착취는 성과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성과사회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성과를 내려고 경쟁한다. 누군가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자기 착취는 심리적인 부담과 함께 육체적인 탈진을 가져온다. 그러나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유'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는 착취하는 자가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착취하는 사람이 느끼는 자유는 역설적 자유다. 역설적 자유는 자유가 오히려 강박으로 작용하는 현상을 말한다. 성과사회에서 역시,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지만, 오히려 강박을 경험한다. 그런 자유는 자유로운 강제이자 강제하는 자유이다. 역설적 자유는 자기를 향한 폭력으로 돌변한다.
사색하는 삶과 무위의 피로가 필요하다
성과사회에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려면 사색하는 삶, 사유하는 힘이 필요하다. 사색에 잠기는 것은 긍정성의 과잉에 제동을 건다. 성과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그래서 자기 자신조차 돌보지 않는 삶을 멈춰서게 하는 힘이 필요하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천천히 음미하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야 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치료가 아닐까.
한병철은 탈진의 피로가 아닌 무위의 피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위의 피로는 영감을 주는 피로이자 부정하는 힘의 피로이다.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피로를 말한다. 한병철은 '무위의 피로' 사례로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안식일'을 든다. 신성한 안식일은 목적 지향적인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이며,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이다. 막간의 시간이자 놀이의 시간이다.
쉼, 사람을 살리다
성과사회는 '쉼'을 재충전하는 시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재충전을 하는 목적은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쉼은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저 자기 모습 그대로, 그리고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시간과 흐름에 자기를 맡겨두는 것이다. 이는 진정한 자유와, 자아와 세상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전제로 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힘이 필요하다.
기독교 목사로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교회는 진정한 쉼을 선포하는 곳일 필요가 있다. 교회는 교우들을 사색하는 삶으로 이끌어야 하고, 천천히 오래도록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창조해야 한다. 존재하는 그대로 모두를 받아 품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안에서 새로운 세상이 창조되듯이...
"내 모습, 이대로가 나쁜 건 아니야. 넌... 충분히 사랑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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