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_Democracy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를 갈망했던 이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가치이자, 현대인류가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보편적인 사회 통치체제인 민주주의. 그런데, 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디지털화가 만들어낸 ‘진실을 덮어버리는 정보의 홍수’로 말미암아.
최근 민주주의가 당면한 위기를 다루는 저술과 영상이 여럿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와 『공정하다는 착각』을 쓴 마이클 샌델 교수는 올해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라는 책을 저술했다. 마이클 샌델은 오늘날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논증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민주주의의 위기’도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 이 다큐멘터리는 브라질 민중에게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룰라 대통령이 반대 세력이 부린 모략으로 탄핵당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리고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피로사회』를 쓴 한병철이 23년 2월에 세상에 내놓은 『정보의 지배,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책이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이유
많은 지식인이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이유'를 경제적 불평등(양극화의 심화), 민주주의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반지성주의), 극단주의 확산, 언론의 왜곡, 정치의 부패 등에서 찾는다. ‘정보의 지배’를 읽기 전까지,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적은 ‘경제 양극화로 인한 불평등의 심화’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한병철은 더 본질적인 문제를 규명한다. 우리 사회를 결속하는 지배적 관습에 관한 믿음을 상실하게 만들고, 진리를 향한 열정을 가루처럼 분쇄해 버리는 인포크라시(Infokratie) 즉, 정보가 지배하는 사회체제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원인의 중심부에 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법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고 말하지만, 실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은 정보에서 나온다. 정보가 사회/경제/정치적 과정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지배 형태를 정보체제라고 부른다.
경제적 불평등이 민주주의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산업자본주의의 지배 형태인 ‘규율체제’에서 통하는 이야기다. 규율체제에서는 노동문제, 인권문제와 같이 ‘몸과 에너지’를 착취하고, ‘감시와 처벌’에 관한 문제가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한병철은 현대사회가 디지털화되면서 규율체제는 지나갔고, 정보가 지배하는 새로운 체제가 되었다고 말한다. 정보체제는 규율체제가 지배하는 방식과 여러모로 다르다. 정보가 지배하는 체제는 비밀과 투명성으로 훨씬 세련되고 찬란한 연극을 연출한다. 사람들은 착취와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자유롭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디지털화된 무의식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행동에 개입한다. 정보체제에서 디지털 지배방식은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한다.
비교 요소 | 정보체제 | 규율체제 |
지배하려는 것 |
행위자의 정보와 데이터 |
행위자의 신체와 에너지 |
지배하는 수단 |
인공지능, 데이터 알고리즘 |
감시와 통제 |
지배수단의 목적 |
행위자의 행동 조정과 예측 (정신과 영혼 지배=심리정치) |
행위자 생산수단의 착취 (생명정치) |
지배의 특징 |
유연하고 가변적 |
획일적이고 기계적 |
지배하는 기술(skill) |
살짝 찌르는 방식(Nudge) 긍정적 자극 |
강제와 금지 |
인포데믹, 담론적 공론장을 파괴하는 바이러스
정보가 지배하는 체제, 인포크라시에서 정보의 쓰나미(인포데믹)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담론적 공론장’을 파괴한다. 민주주의가 시작할 때 결정적인 미디어는 ‘책’이었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책과 민주주의 공론장 사이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말한다. 책 출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문화에서 발생하는 공적인 담론은 대체로 사실들과 생각들을 정합하여 규칙에 맞게 배열하는 특징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전자공학적 군중 미디어는 책 문화가 빚어낸 합리적 담론을 오락과 기분전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긴 호흡이 필요한 서사보다 단신을 쏟아낸다. 정보의 바이러스적 확산과 증식, 곧 인포데믹은 공론장을 사적 공간들로 파편화하고, 우리의 주된 관심사를 사회 전체에 관한 주제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원심력을 발휘한다.
인포데믹은 담론의 시간성과 담론적 합리성을 파괴한다. 담론에 깃든 시간성은 가속되고 파편화된 소통과 조화될 수 없다. 담론이 형성되고 담론을 통해 사회가 변화하려면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신으로 소비되는 인포데믹은 담론이 가진 시간성을 파괴한다. 담론적 합리성도 마찬가지다. 정보사회는 숙의를 통한 합리적 문제해결보다는 단기적 해결과 성과를 지향한다. 따라서 깊이 철학하는 과정보다는 감정적 흥분이 더욱 효과적인 기술로 작용한다. 흥분하게 만드는 기술을 가진 심리정치는 자율과 의지를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심리정치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르는 ‘선거’를 꽃을 피우는 생명정치가 아니라 군중 미디어 연출 전쟁으로 격을 떨어뜨린다. 연출된 민주주의에서 진실과 정직은 중요성과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민주주의는 느리고, 호흡이 길고, 지루하다.
따라서 정보의 바이러스적 확산 곧 인포데믹은 민주주의적 과정을 심하게 훼손한다.
미디어 이론가 페이르 레비가 에세이 <집단 지성>에서 말한 직접민주주의보다 더 직접적인 민주주의라고 부른 ‘디지털 민주주의’는 환상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의 공론장을 벗어난 디지털 소통은 오히려 민주주의적 과정에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정보는 사적 공간에서 생산되어 사적 공간에서 전송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공론장을 이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소셜미디어와 같은 인터넷 소통공간은 공동체 없는 소통을 강화하고, 소통을 소비하게 만들 뿐이다. 디지털 커뮤니티는 정치적 행위를 할 능력이 없다. 대학가에서 대표적인 사례가 ‘에브리타임’ 앱이다. 에브리타임에서는 감정 소비만 있을 뿐 담론을 형성하지 못하고,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민주주의적 참여 의식을 퇴화시키고 만다.
디지털 소통을 통한 민주주의적 소통 행위의 종말
민주주의적 담론을 위해서는 내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세계 속에서 내 위치를 받아들이고 그 위치에서 내 의견을 형성할 수 있게 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지금 있음’이 없으면 내 의견은 담론적일 수 없고, 대표적이지 않으며, 자폐적이고 외곬이며 교조적인 것이 된다. 반향실, 필터버블 효과는 타인이 사라지는 대표적인 현상이다. 타인이 사라지므로 경청 능력이 부재하게 되고, 더 이상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인포크라시가 가져온 민주주의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공동체 없는 소통으로서 디지털 소통은 경청의 정치를 파괴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말만 듣게 되고, 이는 곧 소통 행위의 종말을 가져온다.
소통적 합리성 VS 디지털 합리성
정보체제에서 담론은 데이터로 대체된다. 데이터주의자들은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더 경청을 잘한다고 주장한다. 담론은 논증을 통해 합리성을 개선한다. 반대로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분석하는 알고리즘은 스스로 오류를 계산하여 수정하면서 최적화하는 방식으로 논증을 흉내 낸다. 데이터주의자 관점에서 보면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따른 디지털 합리성은 소통적 합리성을 훨씬 능가하여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고 믿는다. 개별인간은 정보를 처리하는 용량에 한계가 있고 오류 투성이어서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기계적으로 계산한 것이 훨씬 믿을만하다고 평가한다.
소통적 합리성은 개인의 자율과 자유에 기반한다. 반면, 디지털 합리성은 개별 행위 데이터들의 총체적인 합에 기반한다. 소통적 합리성은 개인에서 출발하지만 디지털 합리성은 집단에서 출발한다. 디지털 합리성을 추구하는 정보체제에서 개인은 사라지고, 인간성 마저 데이터 집단에 용해되고 만다.
“모래에 그린 그림을 파도로 휩쓸어 없애는 저 바다는 지금은 끝없는 데이터의 바다다. 그 바닷속에서 인간은 용해되어 가련한 데이터 찌꺼기로 가라앉는 중이다.” 정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진실을 향한 충동은 약화되고, 새로운 허무주의가 확산한다. 허무주의는 우리가 진실 자체에 대한 믿음을 상실할 때 발생한다. 진실은 다양한 주장들이 모두에 맞선 모두의 전쟁으로 사회의 전면적 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다. 진실은 필수적 관습으로서 사회를 결속한다.
새로운 허무주의는 거짓말이 진실로 제시된다거나 진실이 거짓말로 비방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과 거짓말의 경계를 흐린다. 대표적인 예가 가짜뉴스다. 가짜뉴스는 거짓말이 아니다. 가짜뉴스는 사실성 자체를 공격하고 실재를 탈사실화한다. 진실의 위기는 사실들에 대한 믿음 자체를 뒤흔들며 다가온다.
진실체제 VS 정보체제
진실은 서사적이고 독점적이다. 반면, 정보는 가산적이고 누적적이다. 진실은 더미를 이루지 않는다. 그러나 정보는 더미나 쓰레기가 존재한다. 진실은 흔하지 않고 우연과 양면성을 제거하며, 이야기로 상승한 진실은 뜻과 방향 설정을 창출한다. 그러나 정보는 뜻이 텅 비어 있고 방향 설정력이 없다. 진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지 팩트체크를 아무리 한다고 제작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정보의 옳음 또는 맞음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말해진 바에 관한 이성적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따라서 진실은 약속이다. 이해와 합의로 담론을 형성하고, 담론적 진실은 우연과 양면성을 제거하여 사회를 안정시킨다.
진실이 위기에 처하면 항상 사회에 위기가 찾아온다. 서사적 공간 안에서 존재하는 진실과 달리 정보나 데이터는 독자적으로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텅 비어있고 투명하다. 탈서사화된 정보사회에서 진실은 근본적으로 의미를 상실한다. 민주주의는 ‘진실 말하기’를 전제한다. 그러나 인포크라시에서는 진실 말하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실을 향할 의지를 상실하면 진실의 위기가 찾아오고, 진실 말하기가 전제되는 민주주의는 종말을 맞이한다. 오늘날 정보체제는 진실체제를 몰아내고 있다.
탈사실적 정보사회에서 진실의 열정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진실의 열정은 정보 소음 속에서 사그라든다.
진실은 파열하여 정보 먼지가 되고, 그 먼지는 디지털 바람에 날려 흩어진다.
진실은 지난날의 짧은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우리는 진실이 위기에 처한, 믿음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한동안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가치를 담보한 민주주의가 새로운 허무주의에 허물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종말은 오늘 우리가 공유하는 공동체적 가치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병철이 예상한 대로 진실을 향한 용기와 열정이 디지털 바람에 날려 먼지가 되고 말 것인가.
책을 읽은 뒤, 진실을 향할 용기와 의지가 더욱 생겼다. 거센 디지털 바람에 내 몸과 영혼이 먼지로 분쇄될지라도 진실을 향해 나아가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된다. 디지털 바람과 정보의 쓰나미에 맞서는 삶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걷는 십자가의 길이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은 서사를 상실하여 뜻과 방향설정을 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성과 행동양식을 제공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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