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커보이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느날 작고 여리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리고 처음 월급을 손에 쥔 날, 작아보이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다. 아버지가 날 먹여 살린 게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아버지가 살아오신 고달팠던 길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세 아이 아빠가 된 나는, 아직 ‘아버지’란 이름을 갖지 못했다. 나는 어떤 아버지로 아이들이 기억하게 될까?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나는 ‘아버지'란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우리 현대사는 많은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특히, 현대사 초기 이념 갈등이 낳은 혐오와 국가폭력에 많은 사람이 희생 당했다. 희생자와 유가족들은 어쩌면 오늘까지도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사는 지도 모른다. 연좌제 같은 국가폭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자기 신념을 따라 소신껏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소설 속,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는 ‘빨갱이 딸’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외동딸과 혁명동지 아내보다 항상 이웃을 먼저 돌봤다. 인간을 사랑하고 너무 신뢰한 나머지 호구처럼 다 퍼주고 오지랖 넓게 낯선 사람 일까지 나서서 해결하던 아버지. 정작 처자식은 안중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죽음으로 삶의 고통에서 해방을 맞기까지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도 끝까지 사회주의와 인민해방이라는 이념과 소신을 굽히지 않고 신념을 따라 행동했다.
고집스런 빨갱이였으나 아버지가 추구한 건 껍데기 뿐인 사회주의 이념이 아니라 깊은 인류애, 즉 사람을 향한 믿음에 뿌리를 둔 인민해방이었다. 뒤통수를 맞고 남의 빚을 떠안아도 ‘오죽하믄'으로 퉁치며, 돈보다 사람을 더 사랑한 아버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싶지만, 결국 그 인류애는 거대한 사랑으로 돌아오고, 그 깊은 인류애 속에 남몰래 감춰둔.. 깊고 깊은 처자식을 향한 사랑이 있었으리라… 소설을 읽고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이웃에게 덕을 끼치는 삶을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거창한 이념, 말뿐인 사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소신을 따라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게 진정한 투쟁이다. 그런 삶을 살아야지. 꺾이지 않는 소신을 가진 행동하는 아버지로...
마지막으로, 소설 속 아버지께 몇마디 올린다.
-아제, 참말로 대단허시당께라. 아따 어쯔고 그 흠한 세월을 그러코롬 폼나게 사셔쓰까잉. 지도 우리 자슥들한테 남사스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어라. 고맙소잉. 아부지라는 이름의 무게를 새삼 느꼈지라잉.
-아래는 꼭 기억하고픈 소설 속 문장이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불렀다.” -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먼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하는 것이여.” -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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