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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깊은 밤 노래

by 마빡목사 2023.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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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노래

 밤이 깊었는데, 풀벌레는 지치는 법이 없다. 아파트 창문 거의 눈 감았는데도 풀벌레가 부르는 사랑노래는 쉼표 없이 무한 반복이다. 누굴 찾는 게냐. 사랑하는 연인을 찾는 건지, 자기네들끼리 명창을 뽑겠다고 노래자랑을 하는 건지 미련한 자로서 알 길이 없다. 네가 사랑을 아냐. 풀벌레 사랑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는 무심한 자는 눈을 감고 가만히 풀벌레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찌르르 찌르르. 쭈륵쭈륵쭈륵. 이르리 이르리. 가만 듣고 보니 그리움에 사무친 슬픈 가사가 가슴에 구멍을 판다. 그래. 이 밤이 지나기 전 그리운 님을 만나야 할 텐데. 곧 사랑에 메마른 겨울이 오기 전에 말이야.

 밤이면 밤마다 노래하는 풀벌레처럼 누군가를 위해 기약 없는 열심을 내본 적 있던가. 끝끝내 그리운 님을 만나지 못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 부를 기력이 다한대도. 풀벌레는 여전히 밤마다 찌르르 찌르르 쭈륵쭈륵 이르리 이르리 노래한다. 기약 없는 그리운 님을,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님을 기다리면서도 지친 기색이 전혀 없다. 깊은 밤, 풀벌레가 부르는 노래에 한 없이 부끄러워지는 나. 찌르르 찌르르 운율을 타고 슬픈 가사를 흥얼거리며 마음에 삼킨 눈물을 닦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발버둥 칠수록 빠져드는 늪.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낙심할 때, 노래를 부르라고 풀벌레가 옆구리를 찌른다. 기약이 없어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데도 노래하라고 등을 토닥인다, 풀벌레의 슬픈 사랑노래가. 노래는 소리에서 몸짓이 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 그래, 괜찮다. 너는 노래야. 그저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라면 충분해. 네 노래도 역시 몸짓이 되지. 누군가에게 함께 노래하자고 옆구리를 찌르는 노래.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며 자괴감에 빠진 이의 등을 토닥이는 노래 말이야.

 신은 모든 생명이 노래하게 만들었다. 어떤 존재든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면 노래를 한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면 구성진 가락이 들린다. 오랜 세월에 깎인 바위도, 동해바다 빛깔로 물든 하늘에 둥둥 떠 유랑하는 구름도, 살랑이는 가을바람과 맞장구치는 나무도 노래를 한다. 무뚝뚝해 보이는 바위마저도 안드레아 보첼리 못지않게 깊고 묵직하게 가슴을 울린다. 그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데도 바위의 노래는 그 자리에서 존재의 의미를 가사에 담는다. 그 바위가 부른 노래는 오로지 그 바위만의 감동이 있다. 그 어떤 것도 그 자리에 있는 바위의 노래가 선사하는 감격을 대신하지 못한다.

"그 어떤 것도 그 자리에 있는 바위의 노래가 선사하는 감동을 대신하지 못한다"

 노래하는 자. 소리 내지 못할지라도 존재의 시간과 무언가를 향해 애쓴 노력의 결과는 결코 헛되지 않다. 노래가 되어 누군가의 마음을 적시리라. 기약 없이, 끝끝내 아무런 성과가 없을지라도. 노래는 몸짓이 되리라. 작은 몸짓 하나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거대한 바람이 되리라. 노래하자. 다같이.

 눈을 감고 풀벌레 노랫소리 리듬에 영혼을 싣고 잠을 청한다. 그리운 님을 만나게 될까.

 

2023.09.19. 오전 12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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