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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미역국 주인

by 마빡목사 2023.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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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국 주인

 39번째 생일을 앞둔 저녁이었다. '어머니'란 하얀 글씨가 검은 화면에 둥둥 뜬 채로 손전화기가 부르르 떨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한 시간 반 걸리는 거리, 경상남도 함양군에 사시는 울엄니. 저녁 식사 시간이 되니 내일 생일을 맞이할 아들이 생각나 전화를 하신 게다.

"아들, 내일 생일이네?"

"네^^" (아이고 엄니, 몰라서 물으시는 것도 아니면서ㅎㅎ)

"아롱이랑 특별한 약속 있어?"

"아니, 뭐 그냥 아이들하고 생일 파티 해야지" (아이고 엄니, 생일이 별거라고. 아롱이랑은 하루하루가 특별해요. 엄니가 저랑 특별한 약속을 잡고 싶으시구먼)

"미역국은 먹으려나... 가보지도 못하고 미안하네"

"아이~ 미역국은 엄니가 드셔야죠. 괜찮아요~"

"그래도, 선물로 십만 원 보낼게~"

"아이 무슨, 돈도 없으시면서. 오만 원만 보내도 괜찮아요."

"그래, 내일 생일 잘 보내고~!"

"네, 엄니." 

 짧게 끝난 통화. 몇 마디 주고받았는 데, 목소리에 담긴 이야기보따리가 가슴에 쌓인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젖먹이 아들이 젖을 갓 뗐을 때처럼, 둥지가 텅 빈 어미 참새의 지저귐처럼 들렸다. 하나뿐인 아들, 생일날 대접을 제대로 받을까 노심초사하며 미역국을 끓여주고 싶었던 거다, 미역국을 대접받아야 할 분은 당신이면서. 자기 목숨을 걸고 나를 살린 어머니는 한 시간 반 떨어진 거리에 아들을 두고서 미역국에 눈물을 담는다. 

 어머니는 뱃속에서 혹과 나를 같이 키웠다. 혹을 떼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을 하면 아직 눈도 떠보지 못한 나를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또 가지면 되지' 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태아가 건강하게 다 자라는 날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혹을 떼는 수술과 함께 나는 빛을 보게 되었다. 1985년 9월 20일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의료기술을 생각하면 산모와 태아 모두에게 위험할 수 있었지만, 두 생명이 모두 건강하게 살았다.

 기적이었다.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도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렸다. 수술은 의사가 하지만 수술의 결과는 신의 손에 달려서이다. 태어난 후 39년째 살아 숨 쉰다는 게 기적이 아니면 뭐라 말할까. 오늘 또 하나, 더 쌓이는 하루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과 다르지 않다. 아들을 자기 목숨을 걸어 세상에 보낸 어머니. 아들은 하나지만, 그 아들이 여러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세상을 더 아름답게 가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결혼해서 애 셋을 낳았다. 자식은 하나에서 다섯이 됐고, 그 다섯 식구는 죽을 위기에 처할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신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살려고 한다. 기적이다. Amazing grace.

 미역국의 주인은 어머니다. 떨어져 사는 자식을 그리워하며 잃은 기력을 시원한 미역국 국물과 소고기로 달랠 분. 미끄러운 미역을 고속도로 타듯 쭈욱 타고 한 시간 반 거리를 날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생일 파티를 함께 하는 분. 슬퍼하지 마세요. 몸은 멀어도 마음은 제 곁이니.

 소고기 듬뿍 담은 고소한 미역국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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