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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잠시만 안녕, 봄

by 마빡목사 2023.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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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토록 기다렸던 봄인데, 헤어져야 할 때가 다가온다. 따스했던 햇볕이 어느새 따갑다. 봄볕은 겨우내 추운 바람에 움츠렸던 몸을 포근하게 감싸주었고, 지친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이제는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처럼 봄은 뒷모습을 보인 채 멀어져 간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 가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했던가. 떠나는 봄을 붙잡지 못해 미련이 가슴에 사무친다.
 
  그리움을 달래려고 봄과 사랑을 나눴던 창이 넓은 카페를 찾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지난 연인의 자태가 짙게 물들어 있다. 고운 바람이 불면,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푸른 나무가 호흡을 맞춘 듯이 살랑살랑 나뭇가지를 흔든다. 부드러운 몸짓으로 춤사위를 뽐내는 푸른빛에 빠져들어 찰나에 황홀함을 느낀다. 가질 수 없는 황홀은 푸른 하늘과 호수에 담긴다. 그래,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을.

창이 넓은 카페, 전주 예술공간 '결'이다. 아중호수가 내려다보인다.

  봄은 이렇게 떠나지만, 곧 돌아온다. 반드시. 떠날 때를 알고 돌아올 때를 아는 것. 그보다 지혜로운 것이 있을까. 수없이 반복되는 사계절의 한 부분일지라도 봄의 아름다움은 평생토록 질리지 않는다. 다시 돌아올 걸 알기에 더 아련하다. ‘널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잡을 수 없는 그 공간의 아름다움은 고결하고 거룩하다.
 
  창 너머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의 흔적을 보면서 생각한다. 봄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 잔뜩 움츠려 있다면, 그에게 찾아가 따스한 온기를 전하고 싶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포근하게 감싸 안으며 어깨를 토닥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여름처럼 따가운 사람 말고, 가을처럼 외로운 사람 말고, 겨울처럼 냉정한 사람 말고, 봄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구나 기다리는 그런 사람.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진한 사랑의 추억으로 미련이 겹겹이 쌓여도 떠나야 할 때는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자연의 순리와 비교하면 사람이란 참 호락호락한 존재다. 채워도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른다. 채워지면 곧 싫증을 낸다. 끝이 없는 욕망은 떠나야 할 때를 놓치게 하는 법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않으면 추하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아름다움을 가지려면 봄처럼 빈손으로 가야 한다. 채우기보다는 비우기를 해야 한다.
 
  돌아올 때를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봄은 살아있는 존재를 낳으려고 돌아온다. 봄은 부활의 진리를 깨우치는 계절이다. 봄이 돌아올 때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살린다. 그러나 사람은 죽이는 게 익숙하다. 인류문명은 자연에서 착취한 수많은 생명을 토대로 세워졌다. 현대사회는 이제 자연을 착취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 자신마저 착취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봄은 변함없이 매번 돌아와 인류에게 외친다. “그만 죽이라, 살려야 한다.”
  
  봄처럼 돌아올 때를 아는 사람은 사람과 세상을 살리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자연에서 얻은 것은 자연으로 잘 돌려놔야 한다. 문명을 이룬 인류에게 어려운 과제다. 초콜릿 단맛을 느낀 아이가 초콜릿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이 주는 풍성함을 포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떠난 자리에 생명을 남길 수는 있다. 죽이고 착취하는 걸 최대한 절제하고, 어질러놓은 것은 제자리에 되돌려 놓으면 그나마 희망이 있다. 절제와 정리를 잘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야 언제라도 돌아왔을 때 환영받을 수 있지 않겠나.
 
  다시 넓은 창 너머 봄의 자취를 느낀다. 커튼을 비켜선 봄 햇살이 어느새 테이블 위, 내 손을 지그시 덮는다. 꼭 다시 돌아오겠소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붙잡고 싶지만 보내야 한다. 또 다시 생명을 잔뜩 품고 돌아올 너를 위해.
 
  넓은 창밖 푸른 나무들이 느긋이 추는 춤사위 사이로 봄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간다.
 

상관면 신리마을에 있는 '마재봉'에서 본 상관저수지 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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