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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창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에야 날아간다

by 마빡목사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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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에야 날아간다

 독일 철학자 헤겔이 『법철학』 서문에 쓴 문장이다. 헤겔 철학의 핵심, 또는 철학의 본질을 표현하는 말로 유명한 격언이다. 미네르바는 고대 로마 사람이 지혜의 여신으로 숭상하는 신이다. 고대 그리스인이 숭상했던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로마 사람은 미네르바라고 불렀다. 아테나와 미네르바 둘 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상징이 부엉이다. 

 부엉이 역시 지혜를 상징한다. 어둠 속에서 사물을 잘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이 있어서이다. 지혜는 낮의 덕목이 아니라 밤의 덕목이다. 지혜는 밤의 어둠 속에서 옳고 그름, 선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역시 삶의 현장에서 분별력은 어둠 속에서 바늘을 찾는 일처럼 어렵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밤에 활동한다'가 아니라 '황혼 녘에야 날아간다'라고 표현한 이유

 황혼 녘은 해 질 무렵을 뜻한다. 어둠이 시작되면서 빛이 소멸하는 시점이다. 황혼 녘은 만물의 활동이 종료되고 정리되었다는 상징이다. 헤겔은 완전한 지혜란 변화가 끝난 시점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변화의 정체는 변화가 끝났을 때 드러난다. 혼돈과 격변의 한복판에서는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던 것들이 시간이 흘러 조금씩 제자리를 잡으며 정리가 된다. 참된 지혜는 변화하는 와중에 구할 수 없다. 변화가 끝나는 시점, 바로 그곳에서 찾을 수 있다. 

 시대가 홍수로 불어난 급류처럼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 우리가 확신하고 싶은 것들은 탁류 속에서 찾기 어렵다. 하지만, 냉정하게 황혼 녘의 순간에 이르러보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항상 연결되어 있다. 앞으로 다가올 일, 알아야만 하는 일을 진단하고 싶다면 지금과 지난 시간을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그날 하루에 관한 생각과 판단을 조금씩 정리하고, 이를 통해 다가오는 새로운 하루에 관한 생각에 잠긴다. 이런 시간을 반복하며 하루를 보내고, 이틀을 보내고, 일주일을 보내고, 한 달을 보내고, 일 년을 보낸다.

 사실 이 과정은 매우 지루한 일이다. 시간을 늦춰야 한다. 조바심 내며 서두른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황혼 녘에 날아가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시간 속 지혜를 찾아 어둠을 헤치고 잔잔히 분별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자료 출처] 철학이 내 손을 잡을 때, 김수영, 우리학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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