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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49

위로(慰勞)_윤동주 위로(慰勞) 윤동주_1940.12.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쳐다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파닥거려도 파닥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는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病)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慰勞)할 말이─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慰勞)의 말이 없었다. 2024. 4. 3.
간(肝)_윤동주 간(肝) 윤동주_1941.11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쓰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肝)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야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2024. 4. 2.
화원에 꽃이 핀다_윤동주 화원에 꽃이 핀다 윤동주 개나리, 진달래, 앉은뱅이, 라일락, 민들레, 찔레, 복사, 들장미, 해당화, 모란, 릴리, 창포, 튤립, 카네이션, 봉선화, 백일홍, 채송화, 달리아, 해바라기, 코스모스─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여기에 푸른 하늘이 높아지고 빨간 노란 단풍이 꽃에 못지않게 가지마다 물들었다가 귀뚜라미 울음이 끊어짐과 함께 단풍의 세계가 무너지고, 그 위에 하룻밤 사이에 소복이 흰 눈이 내려, 쌓이고 화로에는 빨간 숯불이 피어오르고 많은 이야기와 많은 일이 이 화롯가에서 이루어집니다. 독자재현(讀者諸賢)! 여러분은 이 글이 씌어지는 때를 독특한 계절로 짐작해서는 아니 됩니다. 아니,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철로나 상정하셔도 무방합니다. 사실 일 년 내내 .. 2024. 3. 29.
쉽게 씌어진 시_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_1942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우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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