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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49

흐르는 거리_윤동주 흐르는 거리 윤동주_1942.05 으스럼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간다. 저 전차, 자동차, 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 가는 것일까? 정박할 항구없이, 가련한 사람들을 싣고서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퉁이 붉은 포스트 상자 붙잡고 섰을라면 모든 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등, 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상징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朴)이여! 그리고 김(金)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아보세' 몇자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뜨리고, 밤을 새워 기다리면서 금휘장에 금단추를 삐었고 거인처럼 날아다니는 배달부, 아침과 함께 즐거운 내림(來臨),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2024. 3. 19.
사랑스런 추억(追憶) 사랑스런 추억(追憶) 윤동주_1942.05.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2024. 3. 14.
흰 그림자_윤동주 흰 그림자 윤동주_1942.04.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2024. 3. 11.
별똥 떨어진 데_윤동주 별똥 떨어진 데 윤동주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濃灰色)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또렷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를 나라고 불러 두자.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胚胎)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生存)하나 보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초점인 듯 초췌하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 바닥을 반듯이 받들어 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 머리를 갑자기 내려 누르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마는 내막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도무지 자유스럽지 못하다. 다만 나는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 허공에 부유하는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루살이처럼 경쾌하다..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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