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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27

하늘이 하늘이 부스럭부스럭. 이른 아침, 주방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눈을 뜬다. 누군가 찬장과 그릇장을 요란하게 여닫는다. 주방 곳곳을 뒤적이다 갑자기 숨을 죽인다.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이내 느린 손짓으로 비닐 봉지를 움켜지는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깬다. ‘촥!’ 과자 봉지가 뜯기며 동시에 고막에 경보가 울린다. 잠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현장을 덮친다. “잡았다! 이놈.” 암행어사 행세를 하는 아빠를 보고도 첫째 아들 하늘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놀란 기미가 전혀 없다. 이미 입안에 과자를 한가득 채우고 오물거린다. 능글맞은 눈매로 아침 인사를 건넨다. “아빠, 잘 주무셨어요?” 해가 얼굴을 드러내기 전부터 밥 대신 과자를 찾아 먹는 아들에게 핀잔이 터져 나오려다 입술에 걸터앉았다. .. 2023. 11. 7.
단풍비 단풍비 가을 끝자락, 햇볕 좋은 토요일이다. 입동이 지나서인지 아침저녁으로 코끝과 손끝이 시리다. 정오 햇볕이 마치 엄마 품에 안긴 듯 따뜻한 온기로 나를 감싼다. 모처럼 포근하게 찾아온 가을 햇볕이 반가워 마음껏 누리고 싶다. 이러한 여유도 잠시, 오늘 역시 일하러 가야 한다. 차에 올라 전주 모 교회로 향했다. 오늘 교회에서 교사 강습회를 한다. 두 달 남짓 나와 몇몇 연구원이 함께 개발한 성탄절 교육 프로그램을 전북지역 교회학교 교사에게 소개한다. 차를 운전해 교회로 출발할 때, 강습회 예행연습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지 몰라 두통이 불청객같이 찾아왔다. 집에서 교회로 가려면 전주 시내로 들어가는 춘향로를 타고 전주 천변을 지나야 한다. 대략 30분 남짓 되는 거리다. 아파트 단지에서 나와 춘향로로 .. 2023. 11. 2.
봄 꽃, 그리고 가을 단풍 봄 꽃, 그리고 가을 단풍 시월 말, 단풍은 황홀했다. 차가운 가을바람은 마른 나뭇가지에 애처롭게 매달린 단풍을 흩날린다. 울긋불긋 물든 단풍 숲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가 부딪혀 쏴하고 파도소리를 낸다. 나뭇가지를 떠난 단풍잎은 살랑살랑 떨어져 이내 오솔길을 붉게, 노랗게 물들인다. 단풍이 깔린 호젓한 길에서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길바닥에 웅크려 있던 마른 단풍이 온몸을 부수며 소리 내어 자기 존재를 알린다. '날 잊지 말아요.' 봄이 오면, 그래서 벚꽃 잎 날릴 때가 되면 어김없이 그리운 아이들이 찾아온다. 구해주지 못했던, 지켜주지 못했던,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염없는 기도뿐이었던, 그때 그 봄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매년 벚꽃을 흩날리는 봄바람이 되어 우리 곁을 찾아오는 걸까. 하늘하늘 흩날.. 2023. 11. 1.
이름 없는 국화 이름 없는 국화 국화 한 송이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든다. 시월의 끝자락, 차가운 가을바람에 국화가 애처롭게 흔들린다. 국화를 가슴에 끌어당긴다. 조금이라도 체온을 전하고 싶다. 눈을 감는다. 세상을 떠난 이와 남겨진 이를 위해 신께 기도한다. “주여, 저들을 위로하소서.” 그러나 위로하는 기도가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온다. 눈을 감고 신께 위로해 달라 몇 번이고 기도해 보지만, 위로는 허망하게 되돌아오고 만다. 답답한 마음에 이 참사가 발생할 때 당신은 무얼 했냐 따져 물으니 신은 내게 질문한다. “너는 누구에게 위로를 전하는 가. 희생자의 이름조차 모르는 너, 얼굴도 모르는 네가 어떤 위로를 한단 말인가. 너는 그저 막연하게 거대한 슬픔의 바위 앞에서 무기력하게 고개 숙이며 눈물을 삼킬 뿐, 무엇을 할.. 2023.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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